
Winter - Wind can be st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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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거 워닝 : 아웃팅(보기 괴로운 수준의 심한 묘사까지는 아님을 미리 밝힙니다)
초록 지붕 집
w. 반조
*
너는 내가 깨달기도 전 성큼 다가와 내 작은 세상을 엉망으로 헤집어두고 사라졌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귓가를 애써 머리카락을 내려 감추고도 나는 너에게는 차마 고개도 돌리지도 못한다.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였다. 서로에게는 어쩌다 보니 비밀 하나 만들지 못했다. 내게 처음으로 네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 생겼다. 네 틀어올린 녹색 머리가 이마에 한 가닥 흘러내린 것은, 푸르른 녹음에 녹아드는 듯한 네 미소는, 내겐 차라리 막지 못할 재앙이었다.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귀를 틀어막으면 뱃속에서 무언가 무거운 것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친구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 애는 도시에서 갓 이사 온 이웃을 반기려는 오지랖 넓은 내 부모님이 친하게 지내라 명령을 내린 어색한 동갑내기 여자애였을 뿐이었다. 우리는 같은 가로수 길에 살았다. 농지만 많은 그 시골 마을은 내 느릿한 발걸음으로는 이십 분은 더 걸어가야 이웃집이 나왔다. 플라타너스가 잔뜩 심어진 먼지 날리는 가로수 길을 한참 걸어, 늙은 가운데가 쩍 갈라진 사과나무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냇가를 끼고 십 분을 죽 걸어가면 초록색 지붕의 노란 집이 보였다. 장미 울타리가 있는 초록색 지붕의 집은 그 애의 집이었다. 마당에는 오렌지 나무 한 그루가 심어지고,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코를 박고 냄새를 맡으면 난간에서 독한 페인트 냄새도 나는듯한 그런 평범한 집이었다. 꼭 그 집과 같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연한 갈색 머리를 양 갈래로 느슨히 묶고선 종아리까지 오는 꼭 인형 옷 같은 흰 원피스를 입고, 그 애는 멀뚱히 떨어져 어색하게 바라만 보는 내가 지겹지도 않은 지 나를 보면 아마 예의상으로나마 싱긋 잘도 웃었다.
시골 마을은 어른들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들도 얼마 되지 않는다. 알고 보니 놀랍게도 나보다 한 살이 더 많던 그 애와는 당연하게도 얼렁뚱땅 나와 같은 학년으로 묶여 같은 학급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내가 셰익스피어를 해석하다가 지루해져 선생인 루이스의 욕을 잔뜩 적어 켄트에게 넘기다 걸려 수업 시간 동안 교실 뒤에 서 있는 벌을 받는 동안에도 그 애는 꼿꼿이 편 허리를 숙이지도 않고선 책을 읽었다. 교실 창문으로 드는 빛에 빳빳하게 다림질한 그 애의 블라우스 옷깃 위로 목덜미가 하얗게 빛났다. 양 갈래로 묶어 늘어뜨린 갈색 머리는 그 애가 몸을 뒤척이면 어깨에서 미끄러져 등 뒤로 떨어졌다. 세 학년이 뭉뚱그려져 진행되는 수업은 엉망이었고 나는 움찔거리는 그 뒤통수에 시선을 뺏기고는 했다. 루이스가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무시하고는 나는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도시에서 왔다던 그 애는 시골 토박이인 우리와는 전혀 달라 보였다. 농장 일은 도와본 적도 없을 것 같은 부드러운 손은 굳은살 하나 없었다. 톡 쏘아붙이는 듯한 새초롬한 말투를 처음 듣고서 그 애가 없는 자리에서는 괜히 젠체한다는 뒷이야기도 나왔다. 상급학교 과정의 수업을 듣는 것을 반쯤 옷깃을 붙잡고 늘어지며 떼를 쓰다가 간신히 허락받은 나와는 다르게 그 애에게는 그런 수준 높은 수업을 듣는 것마저 당연해 보였다. 초록 지붕 집 이사 온 쟤 있잖아. 루이스 선생님이랑 말하는 거 들었는데 쟤는 고등학교 과정만 공부하는 게 아니라 대학도 갈 거라더라. 공부 잘하는 켄트도 부모님 목장 돕느라 못 가게 될 거라는데. 그 애는 부모님 과수원의 사과 따기를 도와야 할 의무도 없었고 해가 지기 전 풀밭에서 몰아다가 우리에 넣어둬야 하는 고집 센 짜증 나는 염소도 없었다. 그 애가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이라 해 봐야 뻔했다. 기껏해야 가족들이 먹을 건포도를 넣은 쿠키를 굽고, 손수건에 수를 놓으며 차를 마시다가 설거지를 해 튼 손에 호들갑을 떨며 기름을 바르고 그러겠지. 내가 그런 괴상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은 언뜻 보면 당연했다. 부모님은 내 모든 행동을 그 애에게 비교해댔다. 부모님은 올해부터 치마도 입지 않고선 여자애답지 못하는 게 바지까지 입기 시작한 나를 보고서 그러고서 네가 어떻게 숙녀가 될 수 있겠느냐며 반쯤 기절하려 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편견이 깨진 것은 그 애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걷는 등굣길을 달력이 네 장은 넘어갈 동안 걸은 이후였다. 가을이었다. 플라타너스는 그 애의 머리만큼 연한 갈색으로 물들어 내 얼굴보다도 더 큰 잎사귀를 떨궜다. 나는 수업이 끝나면 학교로 쓰는 창고 건물 뒤편에서 담배를 피웠다. 친구에게 배워 새로 생긴 버릇이었다. 딱히 숨어 피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어째선지 계속해서 이런 구석진 장소를 찾아들었다.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에라도 남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아무도 오지 않는 학교 뒤 소각장으로 향하는 흙길, 부츠 끝으로 뭉개면 바스러지는 낙엽을 괜히 발로 퍽퍽 밀어 걷어차고는 나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빼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기 위해 늘어진 가방 속을 뒤지던 와중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 색은 녹음이 드리운 듯 투명한 녹색. 말이 없어진 건 의외로 내 쪽이었다. 그 애는 여전히 크게 뜬 눈을 깜빡이며 손에 든 갈퀴를 들어 보였다. 오늘의 이 작은 학교라 하기도 모호한 좁은 건물 마당의 청소 담당은, 이제서야 생각해보니 그 애였다.
“너 여기서 담배 피는 거니?”
“아… 어, 음, 불편하면 안 그럴게.”
“뭐 어떠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딱 그 순간부터 그 애가 조금 달라 보였다고 해도 지나치지는 않는 말이라 생각한다. 그 애는 내가 억지로 만들어 붙였던 편견 속의 요조숙녀와는 확실히 달랐다. 냉랭하다고만 느꼈던 말투는 생각보다 새침하다고 느껴지는 정도에 그쳤고 생각보다 통하는 것도 많았다. 그렇다고 우리가 갑자기 절친한 친구가 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집에 가는 길이 겹치면 같이 걸었던 것이 전부였다. 우리는 같이 걷다 보면 한둘씩 이야기를 꺼내 놓기도 했다. 반쯤 놀리려는 의도로 진짜 가족들에게 건포도 든 쿠키를 구워주느냐 물으니 그 애는 애매한 얼굴이 되어 자기는 건포도를 싫어해 단 한 번도 구워본 적은 없다고 답했다. 그래? 나는 좋아하는데. 우리 취향 되게 안 맞다. 킥킥 웃으며 그런 사소한 취향을 하나둘 주고받는 사이가 되니 부모님이 우리의 미묘한 교우관계를 눈치채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처음에는 돗바늘이 망가졌으니 빌려오라 했고 그다음은 잘 만들어진 염소 치즈를 주고 오라고 했다. 그 애와 집 앞 플라타너스 길에서 헤어진 것이 십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또 사과 파이가 너무 많으니 주고 오라고 넘기는 것에 나는 이상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려댔다. 누가 봐도 나를 그 집으로 놀러 보내려고 하는 것이 뻔한 수작이었다. 부모님은 왈가닥 같은 내가 그들 기준에서 얌전한 그 애와 어울리는 것을 꽤 좋아했다. 내가 그 애와 어울린다면 더는 담배도 피우지 않고, 발목까지는 오는 당장 수녀원에라도 가야 할 것만 같은 칙칙한 원피스를 질질 끌고 다닐 것이라고 라도 생각한 걸까. 그 애 부모의 생각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교회에 갈 때나 꺼내 신던 구두에 풀 먹인 파란색 원피스까지 꺼내입고 초록 지붕 집으로 갔건만 그들은 여전히 껄끄러운 얼굴을 하고는 그 애의 방이 있을 위층으로는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다. 아마 내 머리가 엉망이라 그럴 거야. 아니면 단화에 흙먼지가 묻은 것 때문에. 심부름시킨 게 짜증 나서 좀 뛰어왔거든. 문전박대를 당한 나보다도 더 우울해 보이는 그 애를 위해서 허둥지둥 변명했지만 어머니에게 부탁해 잔머리 하나 빠져나오지 않게 머리를 단단히 땋고 단화에 반짝이는 광이 돌 정도로 깨끗이 닦고서 나타난 이후로도 그 애의 부모님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예 그런 어색한 방문이 몇 차례 반복된 이후로는 나는 초록 지붕 집의 현관문 안쪽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초록 지붕 집은 내게는 이제 난공불락의 요새 정도로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꽤 친한 사이가 된 줄 알았는데. 내가 시무룩해하면 그 애는 애써 위로해주었다. 그래도 내게는 네가 제일 좋은 친구란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꽤 특별하게 느껴졌다. 미묘한 우월감에 뱃속 어딘가가 간지러워졌다. 켄트는 나와 함께 있을 시간을 뺏겼다며 가끔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셋이 함께 어울려 놀자는 제안은 바로 거절했다. 여자애들이랑 같이 어울려 놀면 남자애들에게 놀림이나 받을 거라는 것이 이유를 대며 켄트는 언제나 질색을 해댔다. 그 말을 듣고서 나는 바로 빈정이 상해서 그를 쫓아냈지만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애에게 털어놓자 그 애는 켄트의 말을 전해 듣고는 멍청이 같은 생각이라며 코웃음을 쳤다. 우리 학급에서 가장 똑똑할 그 애가 그렇게 말하니 나에게는 그것도 꽤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그럼 뭐 오늘도 우리 둘이서만 놀자. 네가 그걸로 족하다면 그러렴. 그 애의 냉랭한 말투 뒤로 숨은 애정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싱긋 웃었다.
그러던 나를 그 애의 부모님이 미소 가득히 맞아들인 것은 우습게도 금요일 교회 앞 벤치에서 다른 사람들이 빠져나오기 전에 몰래 켄트의 볼에 키스하던 모습을 들킨 이후였다.
“그쪽은 네 남자친구니?”
“네? 네, 네… 안녕하세요.”
누구보다 숙녀 같은 얌전한 딸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은 왈패였기 때문에 집에 오는 것을 싫어했던 게 아니었나. 당최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송아지 같은 눈만 깜빡이는 켄트의 검은 머리를 잡아당기며 괜한 화풀이를 하다가도 다음 주에 학교로 돌아가니 그 애의 부모님이 초록 지붕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애와 내가 꽤 친한 친구가 되었기에 그 애의 부모가 드디어 갈라놓기를 포기한 것이라 가벼이 생각했다. 그것이 내 착각임을 알아챈 것은 수십 번은 그 애의 방에 드나든 이후였다. 그들의 생각은 처음부터 내 짐작과 똑같았다. 그들은 그들의 얌전한 숙녀로 자라 좋은 남자와 결혼해야 할 딸에게,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좋은 영향을 미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애의 방은 언제나 깔끔했다. 침대 옆 작은 협탁에는 언제나 성경책이 올라와 있었고 부인께서 직접 그린듯한 수채화 액자는 침대 머리맡에 걸려 언제나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다. 책장에 꽂힌 시집과 교과서는 언제나 그 자리에 바르게 놓여있었다. 좀처럼 어질러진 적이 없는 그 애의 방 책꽂이를 나는 질리도록 구경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눈길을 잡아챈 것이 있었다. 학교가 끝나는 대로 초록 지붕 집으로 놀러 온 날이었다. 대충 가방만 정리해 두고선 소풍을 가자고 종일 나란히 앉아 속닥거린 대로 그 애는 부엌에서 피크닉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고 나는 그 애의 방 안에서 멀뚱히 서서 매번 보던 책장이 달라진 것이 있나 눈 씨름을 했다. 당연히 없을 것이란 내 생각과는 다르게 그곳에는 비죽, 평소라면 전혀 보이지도 않을 두꺼운 문학책들 사이에 종잇조각 하나가 끼어있었다. 나는 홀린 듯 그 종잇조각을 잡아채 밖으로 끄집어냈다.
꺼내본 그 종잇조각의 정체는 편지지였다. 이미 몇 년은 전에 주고받은 것이 분명한 편지는 우윳빛의 윤기나는 재질로, 그 위쪽에는 로빈이라는 이름이 유려한 글씨체로 적혀있었다. 실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읽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때 가서야 생각해보니 우리는 이상할 만큼이나 남자애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로빈이라니! 대체 이게 누구야! 쓱 훑어보기만 해도 수십 개의 달콤한 애칭들로 가득한 이리도 절절한 연애편지는 정말이지 의외로 느껴졌다. 처음에는 묘사된 대로 로빈이라는 타오르는 듯한 진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애와 사귀었던 그 애를 생각하며 켄트의 맹숭한 얼굴을 생각하고선 피식 웃었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 서 계속해서 읽기 시작하고, 갈수록 무언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비죽이 들었다.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그 애는 여기로 이사 오기 전 도시의 기숙사가 있는 여학교에 다녔다고 했다. 왜 자꾸 어서 내일 학교에서 네 미소를 보고 싶다는 말이 나오는 거지? 처음에는 내가 잘못 이해했겠거니 하고 생각했고 중간에는 옆의 남학교에 다니던 남학생이 아닌가? 나름으로 추론을 하다가, 편지지 가득히 담긴 수많은 애정을 갈구하는 문장들을 보고서, 그 애의 구겨졌던 치맛자락에 대한 문장을 읽고, 도저히 친구 사이로 보일 수 없는 키스를 전하는 그 편지를 보고선 그제야 입을 떡 벌렸다. 교회 앞에서 켄트와 키스하는 나를 보고선 만족스러워하던 부부의 얼굴을 나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상급학교를 다 못 끝내고 급하게 이 시골로 이사해야 했다는 그 애가 이유를 물어보니 얼버무리던 것이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얼떨떨하고, 어색하고, 이걸 어떡해야 하나 당황하여 그저 못 박힌 듯 편지지만 빤 바라보고 있을 때 방문이 열렸다.
“조디, 오래 기다리고 있었니? 어머니의 허락을 받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단다. 이해해주렴.”
그 애는 경쾌하게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싱긋 웃으며 내게 한 걸음 다가오고, 그러다가 책장 앞에서 편지지를 들고 있는 나를 알아채고선 서서히 입매에 올라왔던 그 애의 미소는 사라졌다. 그 애는. 패닉으로 숨쉬기도 힘든지 바로 말도 하지 못하고 목 졸리는듯한 소리를 냈다. 내 바로 앞까지 급하게 뛰어와 내 손에 들린 편지지를 낚아챘다. 당겨져 편지지 구석이 조금 찢어졌지만 그 애는 신경도 쓰지 않는듯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애의 햇빛을 잘 보지 않아 하얗던 얼굴이 이보다도 더 하얗게 질릴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나가! 내 방에서 나가!”
“그게. 미, 미안, 나는 일부러 보려고 했던 게 아니라…”
“나가! 나가라고! 어서 나가!”
더 머뭇거렸다가는 저 피가 안 통할 정도로 세게 움켜쥔 주먹이 내 얼굴로 향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나는 변명하기를 그만두었다. 더 있기를 권하는 그 애의 어머니까지 뿌리치고는 나는 초록 지붕 집을 도망쳐 나왔다. 이상했다. 요새의 성벽이 내 앞에서 허물어진 이후로는 따뜻하기만 해 보이던 초록 지붕 집이 그날 따라 너무 이상해 보였다. 날은 눈부시게 맑았고 집으로 가는 길에는 어린 노새를 끌고 가던 켄트까지 만나 팔짱을 끼고 함께 가로수 길을 걸었지만 내 머릿속은 가로수 길 끝의 초록 지붕 집으로 자꾸만 돌아갔다. 울려는 건지 공포에 질린 건지 아니면 화를 내는 건지 알 수 없던 그 애의 표정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날 이후로 그 애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고 때는 마침 학기의 끝에 다다랐다. 내가 피하려 하지 않아도 그 애와는 마주치기 어려워졌다. 나는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내가 상급 학교 과정을 공부하는 것조차 그다지 내키지 않아 하던 부모님은 도시에 있는 대학교를 보내는 생각이라고는 하지도 않았을 것이 뻔했다. 부모님은 요즘은 아예 내가 켄트와 더 깊이 어울리는 것을 권했다. 시골 마을에서의 아이들의 연애는 곧 결혼까지를 의미했다. 내 미래는 뻔하다 못해 투명해 보였다. 루이스는 내게 마을을 떠날 생각이 없다면 선생이 되는 것은 또 어떻겠느냐며 권했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었었다. 원치 않는 직업이라면 없으니 나마 못하다 느껴졌고 그렇다 한들 내게 끌리는 직업이 있지도 않았다. 선택지는 애초에 있지도 않았는데 배부른 투정만 하는 것 같은 나 자신은 꼭 해가 가는 대로 나이만 먹고 어린 애로 멈춰있는 것 같았다.
굳이 답답한 티타임 자리에까지 켄트를 초대해 어머니와 아버지의 연애사를 듣는 것은 지루하다 못해 답답했다. 제때 설거지를 하지 못해 찻잔 수가 부족해 모두의 앞에는 전부 다르게 생긴 찻잔이 놓이고 안쪽에 불그스름하게 얼룩이 배긴 찻주전자는 괜히 남의 앞에 내어놓기가 창피했다. 곁들이는 음식이라고 해보았자 부스러기가 심한 비스킷에 농장에서 따온 사과로 만든 잼이 조금. 켄트가 어머니의 말을 어색하게 웃으며 듣고 있을 때 나는 이 촌스러운 티세트 위로 예쁘고 화려했던 그 애의 푸른색 꽃무늬가 그려진 찻잔이며 유리 저그 따위를 겹쳐 보았다. 켄트가 싫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차를 홀짝이면 홀짝일수록 이상하게도 이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만연했다.
그 애에게 다시 말을 걸 수 있던 것은 한참 후였다. 내가 그 애의 비밀을 파헤친 것은 봄 학기가 끝나는 날, 여름방학 동안 나는 그 애의 하얀 치맛자락 끄트머리조차 볼 수가 없었다. 멀어진 사이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방학은 빠르게도 끝났다. 개학 후 열흘은 지난날, 오랜만의 학교 뒤편에서 담배를 꺼내 피다가 마주친 것은 예의 그 동그란 눈이었다. 오랜만에 마주 본 그 애의 눈 밑은 퀭하게 그늘이 져 있었고 예전보다 더 창백한 뺨이 파리했다.
“표정이 안 좋네.”
“네가 나라면 좋겠니?”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마자 돌아온 그 애의 대답은 전보다 더 날카로웠다. 초록 눈동자는 원망 어린 눈으로 나를 쏘아보다 고개를 돌리고, 건물 뒤편의 소각장에 폐지가 담긴 상자를 들고가는 그 애의 뒷모습이 애처로웠다. 답답했던 것은 방학 하루로 충분했다. 아직도 그 애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대로 두면 친구를 잃을 거라는 생각이 계속 드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과연 그 애는 나를 이제껏 친구로만 보고 있을까? 말을 걸려다가도 그런 오만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 움직이려는 혓바닥을 옭아매었다. 계속해서 나는 그 애를 피하기만 했었다. 그 애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일부러 자리를 옮겨 켄트 옆자리로 앉고. 그랬던 이유가 있었다. 내 이런 멍청하기 짝이 없는 고민까지도 시리게 파고들 것만 같은 저 에메랄드 빛의 눈동자를 마주 보고도 그 애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아주 충동적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나는 불쑥 제안했다.
“그걸로 당번 일 끝나는 거면 이따가 집 갈 때 나랑 같이 갈래?”
그 애는 나를 어이없다는 듯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순해 보이기만 하다 생각했던 그 눈매는 팩 찌푸려지고, 그 애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는 듯이 입술만 달싹거리며 눈만 깜빡였다. 내가 조마조마해하며 담배 연기만 세 번 빨아댈 동안 그 애의 얼굴에는 원망, 성가심, 허탈함, 분노, 온갖 표정이 뒤섞여 스쳐 지나갔다.
“대신 내 가방은 네가 들어주렴.”
예전과 같이 새침한 말투로 톡 쏘아붙인 이후 소각장 쪽으로 향하는 그 애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묘하게 가벼워 보이는 발걸음에 묘한 후련함이 담겨 있다고 나는 나름대로 확신했다. 결과로만 보면 아주 잘한 짓이라 그제서야 한숨을 뱉을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다시 친구가 되었다. 방학 내내 밖으로는 별로 나가려 들지도 않고 가끔 집에 찾아오던 켄트와만 어울리던 나를 내심 걱정하던 부모님은 우리 집에 놀러 온 그 애를 보고선 기뻐하는 내색을 숨기지도 못해하며 좋아하셨다. 그 편지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은 우리의 암묵적 약속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 애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으로 비쳤을 수밖에 없었지만 내게는 그 주제를 입에 담는 것조차 부담이었다. 내 기준으로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을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답이 맞을까. 고민을 아무리 해보아도 결국에는 잘 모르겠다는 답만 비어져 나왔다. 그 애도 먼저 그 주제를 꺼내지 않잖아.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하는 이유가 있어? 이기적인 마음이 든 이후로는 바로 그에 대한 타당한 반박이 떠올랐다. 그런 주제가 꺼려진다는 건 그 애에게서 딱 내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려 하는 게 아닐까? 나는 그 애를 진짜 친구로 여기는 게 맞기는 맞아? 이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법조차도 그 애에게 배운 것이다. 이미 내게 그 애는 너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결론은 나지 않은 채로 시간만 흘러갔다.
머릿속에서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올라오는 동안 그 애는 부엌에서 쿠키와 찻잔을 들고선 거실로 나왔다. 건포도가 든 쿠키를 한 입 깨물어 먹고선 맛있다고 칭찬했지만 그 애는 쿠키에 대한 평가보다 다른 쪽에 훨씬 관심이 쏠려있는 것 같았다.
“어떠니. 네 생각에는 이게 퍽 어울려 보이니?”
“뭐, 네 눈 색이랑 닮아서 귀엽네.”
“농담하지 말렴. 내 꼴이 우스꽝스러워 보인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염색약을 잘못 발라 눈 색과 아주 똑같은 초록색으로 변해버린 그 애는 뺨을 붉히고는 툴툴거렸다. 창피한 모습이 역력한 것에 웃음을 참으면서도 특별해서 좋다고 계속 칭찬해주자 조금이나마 찡그려진 미간이 펴지는 것 같았다.
“흔해빠진 갈색 머리 대신에 나도 한 번쯤은 검은 머리가 되고 싶었단다. 이 꼴을 적어도 네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대체 왜 고작 며칠 안 보인다고 찾아온 거니. 그리고 너, 조금만 더 그랬다간 정말로 화낼 테니 그렇게 웃지마렴.”
“대체 누구한테 염색약을 샀길래 이렇게나 사기당한 거야?”
낄낄대며 웃던 것을 그제서야 멈추고 물어본 내 말에 그 애는 상기시키기도 싫다며 그저 투덜거리기만 했다. 그 애가 며칠 간 보이지도 않던 이유가 이거였다니. 생각보다 별것도 아니었던 일에 안심이 되었다. 그 애는 얼마 전부터 학교에 나오는 것조차 그만두었기에 마주치기가 쉽지 않았다. 그 애의 어머니가 아프셔서 그 애가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알고 보니 그 애의 부모님은 우리 부모님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남자애도 아닌 여자애는 중등학교 수준의 교육만 받아도 된다는 것이 대부분의 어른들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쓸모없는 학교를 관둘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내심 기뻐하는 모습까지 보았다는 말을 하며 그 애는 진저리를 쳤다. 아버지는 가사를 도와주는 사람을 고용할까 고민 중이단다. 내가 그런 쪽으로 소질이 없다는 것은 잘 알잖니. 그 애는 혀를 차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보다 너, 도시에는 언제부터 간다고 했었니?”
“졸업식이 곧 이니 아무리 늦어도 다음 달에는 갈걸.”
“보고 싶을 거란다. 알다시피 나는 이 마을에 친구라고는 너밖에 없잖니.”
“나라고 너랑 켄트 말고 친한 친구가 있지는 않은걸.”
그 애는 나를 붙잡지 않았지만 나는 그 눈길이 조금 쓸쓸해 보인다 생각했다.
“자주 편지하렴.”
“그럴게.”
처음으로 접하는 도시 생활은 급하고, 얼떨떨하고, 메말랐다. 모든 새롭고 어색한 것들이 내게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이제는 어린 학생이 아닌 성인이라는 것조차가 전부 맞지 않는 옷을 꿰입은 것 마냥 불편했다. 켄트와의 사이는 도시로 오기 몇 달 전부터 시들해진 지 오래였다. 켄트는 매사에 의욕이 없는 나에게 끝없이 다가와 주었지만 나는 받은 만큼 애정을 되돌려주는 것에 서툴렀다. 그에게는 편지를 보낼 주소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내 부모님에게 물어 주소를 알아낼 수 있었겠지만, 그는 그러지도 않았다. 둘 중 누구도 이별을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켄트와는 헤어진 것이 기정사실이었다. 나는 작은 회사의 경리로 일했고 월급은 간신히 플랫의 비용을 댈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도시로 가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었다. 대학도 아닌 시골학교의 있으나 마나 한 졸업장이란 별로 쓸모가 되지 않았다. 부모님은 내게 돌아오길 바라는 편지를 여러 장 보내었다. 출근하고, 한참을 서류와 씨름하다 달이 머리 위로 뜨고 나서야 간신히 퇴근했다. 오롯이 홀로만의 장소가 생기는 것은 좋았으나 그걸 즐길만한 시간은 많지 않았다. 갈수록 모든 인간관계가 피로해지니 몇 장 쌓여있는 편지에 답장하려던 것을 피곤한 눈가를 꾹꾹 누르며 다음 날을 기약하며 책상 위로 던져놓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하루가 멀게 주고받던 그 애의 편지조차 답장이 밀리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는 그 작은 시골 마을의 인간관계가 전부인 줄만 알았으나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알고 지내는 시골과는 다르게 도시는 카페에 종일 죽치고 앉아있으면 하루에 모르는 사람 백 명은 충분히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했다. 내가 도시에 와서 새로 사귄 애인의 이름은 로빈이었다. 이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남자를 가볍게 만나보기로 하며 나는 어쩔 수 없이도 그 애와 풀지 못한 응어리를 떠올렸다. 가히 충격적이었던 그 편지 속의 로빈이라는 그 애의 전 여자친구를 나는 수십 번은 더 떠올려봤을 것이다. 머리는 긴 편일까 아니면 짧을 편일까. 그 애와 함께 있으면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나는 애인은 아닌 친구였지만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아니면 그 로빈이라는 애도 연애를 하기 전에는 그 애의 친구였을까? 혹시 여자들 사이의 연애는 남자와의 연애와는 다르게 필연적으로 절친한 친구부터 시작되는 걸까? 물어보고 싶었던 것은 산더미였지만 나는 결코 물어볼 수 없었다. 이제 와 느끼게 된 것이었지만 그 애의 나를 향한 태도는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였더라 하더라도 그 애의 이상할 정도로 내게 살갑게 굴던 태도는 남들 눈에는 이상하게 비췄을 것이다. 건포도는 만지기조차 싫어하는 그 애는 나를 집으로 초대하는 날에는 나를 위해 언제나 건포도 쿠키를 구웠다. 내 남자친구였던 켄트를 따라 검은색으로 머리를 염색하려다가 실수로 머리를 초록색으로 물들이고, 바로 도로 덮으려 했던 머리색을 내가 마음에 든다고 칭찬하자 주변에서 온갖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녹색 머리를 유지했다. 그 애는 집 밖에서 놀기보다는 집에서 가만히 앉아 책을 읽는 것을 가장 좋아했지만 우리는 매일같이 들판으로 함께 나갔다. 그 애의 말투가 쌀쌀맞기는 하지만 착한 애라는 내 말에는 학급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알고보니 그 애는 나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인사도 잘 받아주지 않는다는 말에 놀랐던 적이 있었다. 내가 눈치채지 못한 것이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아니, 나는 진짜로 모르던 게 맞나? 그저 전부 눈치채고도 애써 무시하던 것이 아니고? 머릿속은 금방 복잡해졌다. 어쩌면 미묘하게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을 나는 과거의 이음매와 같은 로빈을 만나며 풀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 애와의 편지는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뜸해졌다. 이 정도가 적당하다는 생각도 들면서 섭섭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애가 편지 세 번을 보낼 때 나는 간신히 한번 답장한 것이 전부였으니 이건 결국 당연한 결과였다. 그 애의 책꽂이, 체리 색 책꽂이 한쪽에 아직도 그 우윳빛 편지지는 가지런히 꽂혀있을까. 종종 그 애와 함께했던 곳이 복잡하게 얽혀 꿈에 나왔다. 나는 여러 번이나 답장을 쓰기 위해 편지지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로빈이 뒤로 다가와 내 어깨에 키스하는 것을 밀어내며 나는 답장이 밀린 편지를 도로 서랍장에 집어넣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하 척 지내던 세월은 나를 이렇게나 용기없는 머저리로 만들었다. 나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편지를 보내지 못했고 그 애 또한 더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몇 년 새에 나는 초록 지붕 집을 빠르게 잊어갔다. 이건 어찌 보면 잊는 다보다 묻어둔다는 것이 더 맞았다.
매사에 가벼운 듯 굴던 로빈과 싸우고 헤어진 이후로 몇 남자들과 만났다 헤어지고, 우습게도 내가 정착한 사람은 다시 켄트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처음으로 그 이름을 들었을 때에는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잊겠는가. 순진무구한 송아지가 떠오르던 그 켄트보다 이 켄트는 훨씬 진중하고 차분한 타입의 남자였다. 그 켄트의 검은 머리가 아닌 어두운 금발, 그는 그 켄트보다 나와 더 맞는 성격이었다. 연인 사이에서도 무뚝뚝한 우리를 보고서 남들은 사귀는 게 맞기는 하느냐 물어보았을 정도였지만 서로가 있기에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관계였다. 나는 그 관계에 제법 만족했다.
어느 하루는 켄트는 내게 편지 봉투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당연히 부모님이 보내주셨을 것으로 생각하며 가볍게 받아든 편지의 발신인이 그 애인 것을 보고 나는 몇 년 만에 받아보는 뜻밖의 편지에 놀라 눈이 크게 뜨였다. 그곳에 적힌 문장은 매일 편지를 보내겠다는 약속도 어기고 조디 너는 어쩌면 그럴 수 있느냐는 원망 어린 질책이 아니었다. 편지에 써진 것은 정말 내가 전혀, 기필코, 단 한 번도 예상도 못 하던 문장이었다.
캐롤라인과 피에르. 결혼합니다.
문장을 필두로 묻어두었던 그 모든 감정이 물밀 듯 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아주 단순한 문장과는 다르게 그 내용은 전혀 단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혼식 날짜를 알리는 청첩장을 보며 나는 예전의 너의 책꽂이 사이의 편지를 몰래 읽던 기분이 되어 어찌할 줄 몰랐다. 이걸 도저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너는 여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느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너와 결혼이라니. 심지어 한 달이나 우체통에 방치되어있던 편지였던 탓에 결혼식은 바로 내일이었다. 너는, 어떻게. 대체. 이런 청첩장에조차 참가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나 자신이 지독하게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하며 괜찮으냐 물어오는 켄트를 물렸다. 가서 뭘 어떻게 하게. 내가, 내 멋대로 연락까지 무시하던 내가 감히 네게 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나는 반쯤 얼이 나간 채로 자고 일어나 몸을 씻고, 고향 마을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네 결혼식장은 우리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플라타너스 길의 맞은 편으로 죽 걸어가면 나오는 교회였다. 괜히 속이 울렁였다.
“캐롤라인. 이제 슬슬 입장할 준비는 다 됐어?”
누군가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순간 우습게도 네가 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구나, 생각하고야 말았다. 내가 미쳤구나 생각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나는 정말로 끝까지 끔찍하게도 이기적이다. 차마 네 얼굴을 볼 자신이 나지 않아 나는 신부 대기실로 급하게 꾸민 교회 뒤편의 창고 문을 두드릴 수도 없었다. 엄두도 나지 않는 일에 나는 그 문 앞에서 십 분은 더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괜히 목이 바짝 타고,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수십번은 더 생각했던 말을 고르고, 미칠 것 같아 차라리 황급히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다가 문 열리는 소리에 당황해 나는 쥐고 있던 클러치를 떨어뜨렸다. 담뱃갑이 가방 밖으로 튀어나왔다. 급하게 주워담기 위해 담뱃갑을 들고 일어서는 내 머리 위로 너무나도 익숙한, 잊을 수 없는 네 목소리가 들린다.
“너 여기서 담배 피는거니?”
네가 맨 처음으로 내게 건넸던 바로 그 말을 이제 와 다시 듣게 되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너와 눈을 마주치고, 네 시리도록 차가운 눈동자는 오늘도 내 가슴을 난도질하고 들어와 머릿속에 강력히도 박힌다. 네 머리색은 아직도 내가 좋아하던 그대로인데. 이미 한참은 늦은 이제와서야 인정할 수 있었다. 이미 내 세계는 소각장 옆 공터에서 너를 만났던 그날을 기준으로 무너져있었다. 무너진 세계에서 법칙을 찾으려 하니 찾을 수 없던 것이 당연했다. 우리가 친구였다고? 단 한 번도 그렇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너의 애정을 갈구했다. 과연 네가 내게 보인 태도만 그렇게 노골적이었을까. 오히려 네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안달이었던 것은 언제나 나였다. 네 매서운 말투가 내 앞에서만 풀어지는 것에 환희했고 난공불락의 요새인 초록 지붕의 집이 내게만 허락된 것에 가슴을 두근거려했다. 그저 계속 내 감정을 무시하고, 묻어놓고, 덮어두었을 뿐. 검은 머리 켄트가 너는 가끔 보면 내가 아니라 캐롤라인이랑 사귀는 것 같다며 질색할 때도 나는 그저 내심 기뻐했지 않았는가. 어떻게 그걸 단순한 우정으로 착각할 수가 있지?
전부터 이해할 수 없던 감정이 네 눈 맞춤 하나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체리색 책장에서 찾은 편지를 보며 내가 느꼈던 당황과 거부감은 오롯이 질투심과 안도의 회오리로 말미암은 혼란스러움으로 비롯한 것이었다. 네 전 애인에 대한 질투와 나에게도 기회란 있구나 하는 안도.
어째서, 어째서 하필이면 오늘일까. 왜 하필이면. 모든 게 늦었음에도 이미 무너진 세계를 복구할 방법은 보이지도 않았다. 뱃속에서 무언가 무거운 것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캐롤라인, 너는 내게 차라리 재앙이었다.